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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밍찬] 그리고, 봄이었다


※ 제2회 찬른합작 주제 '열아홉의 봄'으로 참여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나는 모든 게 느린 편이었다.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나는 뒤집는 것도, 첫 걸음마도 또래 아이들보다 느리게 딛었고, 말하는 것조차도 느렸다고 한다. 책을 읽는 것도, 알파벳을 떼는 것도, 숫자 계산을 하는 것도. 그렇게 내 온전한 세상은 남들보다 조금 느리게 흘렀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느린 건 문제가 되지 않아. 다만 느리다는 걸 다르게 여기는 조바심이 더욱 너를 두렵게 하는 거란다.

 

 

어머니가 자주 하시던 말씀이 그 까닭이었다. 그녀 스스로가 먼저 나를 다른 사람과 똑같은 사람으로 여겼고, 나는 18년 동안 그 말을 철석같이 믿어왔다. 그러나 남들이 모르는 한 가지, 가족을 제외한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는 사실. 나는 열아홉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등에 나무가 자라지 않았다는 것이다.

 

 

'너 그러다가 한 번 큰코 다친다.'

 

 

친구들이 이런 말을 할 때조차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던 내가.

걱정 말라며 보듬어 주던 어머니의 말씀을 가슴에 담던 내가.

그깟 나뭇가지 때문에 이렇게 엿먹을 줄 미리 알았더라면.

그랬더라면……

 

 

 

 

 

 

 

 

그리고, 봄이었다

열하나

 

 

 

 

 

 

일반적인 피스틸의 경우에 보통은 2차 성장 시기, 12~16살 즈음에 등허리 부근에서부터 나무가 자라나기 시작한다. 그것은 사람의 성향에 따라 밝은 갈색일 수도 있고, 혹은 아예 검은색에 가까운 고동색이 나타나기도 한다. 모두가 그 시기에 발현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99%가 그렇다. 그리고 나는 그 나머지 1%에 속하는 것이다.

 

 

다른 경우를 생각해 보자. 내가 만약 스테먼이었다면? 사실 그 확률은 성장이 거의 멈춘 내 키가 올해 안에 김민규만큼 커질 확률과-조금 씁쓸하지만- 비슷하다. 그래, 거의 없다는 뜻이다. 피스틸과 스테먼의 발현은 유전자의 영향이 크다. 게다가 요즘은 기술이 발달해 예전과는 다르게 검사만 하면 피스틸과 스테먼 중 어떤 운명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 것인지도 알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0.1%의 확률로 그 검사 결과조차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자연적으로 발현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체육시간에 옷을 갈아입을 때면 이렇게 거침없이 옷을 벗어제끼는 아이들이 많다. 그런 자신감을 대변해 주는 듯 이제는 꽤나 골격이 단단해진 아이들의 등에는 기세등등하게 자라난 나무가 마치 하나의 작품인 것마냥 어깻죽지로, 혹은 팔뚝으로 그 우렁찬 생명의 나뭇가지들을 뻗쳐가고 있었다. 나는 체육복을 꺼내는 척하며 힐끗힐끗 아이들 사이에 있는 김민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뭐가 그렇게도 재미있는지. 유난히 도드라지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는 김민규와 고개를 돌리다 눈이 마주쳐 버렸다.

 

 

흠칫 놀란 나와는 다르게 씨익 웃어넘기고 만 김민규는 솔직히 꽤나 잘생긴 얼굴이었다. 연예인을 했어도 꿀리지 않았을 정도였으니까. 소문으로는 이미 내로라하는 3대 모 연예 기획사에서 길거리 캐스팅까지 받았다고 한다.-덧붙여서, 그 제안을 모두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는 것까지도 들었다.- 캐스팅 담당자가 근방 학생들에게 물어 물어 학교로까지 찾아와 교문 앞에서 죽치고 기다리고 있을 정도의 페이스였으니, 이 정도면 그 명성이 대단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 피곤해질 뻔한 상황의 저를 구해 준 게 나라는 걸 김민규는 생각도 못 할 거다. 그날따라 머리가 너무 아파 수업을 조금 일찍 마치고 나가자 교문 앞에서부터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아저씨 한 명이 나를 붙잡고 물어왔다.

 

 

', 아저씨가 xx 엔터테인먼트 캐스팅 담당인데. 이 학교 김민규라고 아니? 내가 민규한테 할 말이 있어서 그러는데. 학교 언제 끝나는지 알 수 있을까?'

'…… 오늘 김민규 학교 안 나왔는데요.'

 

 

그대로 교문을 벗어나 김민규를 찾아 나선 아저씨는 무슨 연유였는지 그 뒤로는 학교로 찾아오지 않았고, . 이 정도면 내가 김민규를 한 번 구해 준 셈이 되는 거 아닌가.

 

 

…… 라고 생각한 것이 끝. 정신을 차려 보니 체육에 목숨을 거는 아이들은 이미 여기저기 교복 허물을 벗어던지고 나가 교실 안에는 몇 남지 않아 있었다. , 안 나가?

 

 

"어어, 나갈게. 먼저 가."

 

 

열쇠 교탁에 두고 간다. 얼른 나와! 말을 마친 김민규는 앞문을 닫고 후다닥 뛰쳐나갔다. 늑장을 부리던 아이들이 하나둘 빠져나가고, 나를 제외한 아이가 불까지 끄고 나가면 그때부터가 내가 옷을 갈아입는 시간이다. 고요한 공간. 몇 분 전까지도 바쁘게 움직이던 아이들이 있던 곳. 내가 아이들과 가장 괴리감이 느껴지는 시간이 아닐까 싶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이 공간을 지배한다. 이곳의 시간이 나를 따라서 느리게 흐르기 시작한다.

 

 

"……."

 

 

타닥타닥. 뜀박짐 소리가 교실 문앞에 멈추고 누군가 고요한 시공의 흐름을 깨부수고 들어온다. 여느 아이들과 달리 교복 셔츠 안에 꼭꼭 챙겨입던 얇고 흰 티셔츠를 벗던 도중 들려온 소리에 놀란 나는 뒤돌아보았고, 교실 앞문에 서 있는 김민규와 눈이 마주쳤다. 김민규의 시선이 밑으로, 밑으로, 등으로 내려간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등판. 수치심이 먼저 훅 치고 들어온다. 크게 놀라지 않은 척하며 황급히 티를 마저 벗고 체육복 상의에 머리를 집어넣았다. 촌스러운 파란색 체육복 끝자락을 움켜쥐고 자꾸만 괜히 아래로 내렸다.

 

 

봤을까.

봤겠지?

 

 

치부를 드러낸 기분이었다.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 감정이었다. 김민규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내가 느리다며 핀잔을 주었던 그 여느 사람들과 같은 눈빛일까.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가 어떤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든 내 생애 가장 당황스러웠던 순간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대로 김민규를 지나쳐 교실을 빠져나갔다. 항상 느긋했던 발걸음이 빨라져 있었다.

 

 

 

 

그의 시선이 자꾸만 나를 옭아맸다. 이어진 체육시간에도, 열광적으로 뜀박질 이후의 나른한 수학시간에도, 흥분하며 뛰어가던 아이들 사이의 점심시간에도. 식판 위의 것들을 빠른 시간 안에 해치운 김민규는 지치지도 않는지 다른 아이들과 함께 그대로 운동장으로 달려나갔다. 그게 불과 몇 분 전. 대부분의 아이들은 운동장이 제 서식지라도 되는 것처럼 그곳에서 미친듯이 뛰었다. 공은 먹잇감. 그리고 아이들은 먹잇감을 쫓는 맹수들, 혹은 공놀이에 환장하는 애완견처럼 보였다. 맹수 혹은 애완견들 사이로 머리를 휘날리며 달리는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김민규는 잘생겼다. 김민규는 축구를 좋아하고, 활발하다. 김민규는 인기도 많다. 선생님들도 김민규를 좋아한다. 맡은 일을 책임지고 잘 해낸다나 뭐라나.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던 아이. 김민규와 같은 반이 되고 난 이후로 그와 관련해 느꼈던 것은 그것뿐이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아이. 김민규의 세상은 내 세상을 2배속 시킨 것마냥 그렇게 빠르게 흘러 돌아갔다.

 

 

그 순간 김민규가 골을 넣었다. 특유의 송곳니를 드러내는 웃음과 함께 팀원들에게 둘러싸인 김민규가 보인다. 그런데, 쟤 지금 날 보고 있는 건가?

 

 

이상한 기분이었다.

 

 

 

 

 

 

"너 피스틸이라며. 근데 왜 나무가 없어?"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종례 후 아이들이 우르르 빠져나간 교실 속에서 김민규가 내게 묻는다.

 

 

"…… 네가 알아서 뭐 하게."

 

 

나도 모르게 날카로운 어조와 눈빛으로 그를 먼저 경계하게 되었다. 나는 김민규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대답하며 책상 위에 있던 것들을 대충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일부러 다른 아이들이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어본 게 틀림없을 거라는 생각에 기분이 확 상하고 말았다. 사실 그 상태에서 더 상하고 말고 할 기분도 아니었지만. 그대로 김민규를 지나쳐 먼저 교실을 나섰다. 다음날부터 무슨 일이 생길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 * *

 

 

 

 

이게 무슨 상황이람. 어쩐지 문을 열고 얼핏 본 내 자리가 왠지 어색하더라니. 옆자리 짝꿍이었던 아이는 어딜 가고 뜬금없는 김민규가 떡하니 앉아 있다. 덩치에 반비례하는 조그만 바나나우유에 꽂힌 더 조그만 빨대를 쪽쪽 빨아대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다.

 

 

"일찍 왔네?"

"……."

 

 

작게 헛웃음치고 싸그리 무시한 채 의자에 앉고선 그대로 책상 위로 널부러졌다. 여긴 대체 왜 온 거야……. 인간의 본능이라는 것이 앞으로의 생활이 그리 편치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했다. 옆에서 무얼 하는지 자꾸만 부시럭댄다. 이내 소리가 멎는다.

 

 

"1교시 전에 깨워 줄까?"

"네 알아서 해."

 

 

마지막으로 바닥에 남은 우유를 야무지게 쪼옥 빨아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김민규는 정말로 나를 정확히 1교시 시작 1분 전에 깨웠다.

 

 

 

그때부터였다. 김민규가 나를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한 것은. 원래 짝꿍이었던 아이를 몰아내고 옆자리를 차지하지를 않나. 자리에만 가만히 앉아 있으면 되지. 내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는 것은 대체 무슨 심보람. 쉬는시간 종이 울리고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면 곧이어 김민규가 일어나 내 뒤를 따른다. 내가 매점을 가면 매점으로, 할 일 없이 복도로 나가도 기어이 따라나오고는 했다. 그 행동이 정말 나를 따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지 알아보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척했다가 다시 앉은 적도 있었다. 역시나 결과는 하나였다. 김민규는 혼자 무언가 하고 있더라도 내가 움직이는 소리라도 들린다치면 곧바로 움찔하며 일어났다.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김민규는 스테먼이라고 들었다. 무슨 꽃을 가졌는지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그래서 더 괘씸했다. 그의 숨겨진 엿먹이기 기술에 당한 것 같았다. 가지도 안 난 피스틸이라고 무시하는 건 아닐까. 아니면 쓸데없는 동정심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어지는 국어 수업. 정말 내 옆자리를 꿰찰 셈인지 점심시간이 지나도록 자리를 바꾸지 않은 김민규가 나름, 사실은 정말 열심히 필기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목소리 톤이 너무나도 일정해 누구든 들으면 잠이 쏟아진다던 전설의 국어 시간임에도 김민규는 평소에는 쓰지 않는 안경 너머로 칠판과 교과서를 번갈아 보며 열심히도 적는다. 오랫동안 너무 노골적으로 쳐다본 탓인지 내 시선을 의식한 김민규가 나를 흘긋 바라보았다.

 

 

이내 조그만 글씨가 쓰여진 귀퉁이를 찢어내더니 내 쪽으로 스윽 내민다.

 

잘생긴 건 아는데 그만 봐 닳으니까

내가 그렇게 좋아? ㅋㅋ 」

 

 

미친놈. 누구와도 서스럼이 없고 성격이 좋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원래 이런 아이인가 싶었다. 가차없이 조각내 버리려다 그 조그맣디 조그만 종이를 찢기에는 괜히 사서 고생하는 것 같아 그대로 반, 거기에서 반, 또 반을 접어 고대로 김민규에게 넘겼다.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웃는 것도 기분 나빠하는 것도 아닌. 김민규는 그 꾸깃꾸깃 접어진 종이 쪼가리가 뭐가 좋다고 필통 주머니에 고이 넣어놓았다. 그 모습을 보자니 복잡해지는 마음에 결국 그대로 책상에 엎드려 버리고 말았다.

 

 

진짜, 이상해.

 

 

 

 

 

오이무침? . 식단표에 써 있는 글자를 보기만 해도 비린내가 혀에 맴돌았다. 다른 건 다 잘 먹는 내가 유일하게 입에도 대지 못하는 게 하나 있는데, 바로 오이였다. 다들 이유 없이 못 먹는 음식 하나쯤은 있지 않나. 결국 급식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책상에 늘어졌다. 항상 이 시간이 되면 알아서 척척 움직이던 것이 텅텅 비자 위장이 꼬르륵 진동하며 심통을 부렸다. 그치만 오이 냄새만 맡아도 토할 것 같은걸. 급식실 근처에만 가도 오이 냄새가 진동할 것 같만 같았다. 사서 고통을 받을 바에야 차라리 잠이나 자며 배고픔을 달래자 싶어 자세를 고쳐앉았다. 요새 살이 올라 통통해진 팔뚝살을 베개 삼아 엎드려 눈을 감았다.

 

 

"밥 안 먹어?"

", 오이 못 먹어서. 입맛 떨어졌어."

"그럼 일어나."

"?

"일어나라고. 매점 가게."

", 아니."

"아 내가 사 준다고 할 때 가, 그냥."

 

 

굶으면 키 안 커, 인마. 여기에서 멈추려고? 결국 나를 일으켜 이끄는 김민규에 의해 매점을 향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내 키가 왜? 어때서? 주먹을 들어 편하게 어깨동무를 한 김민규의 옆구리에 냅다 꽂고는 먼저 앞질러나갔다.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엄살을 부리던 김민규가 휘적휘적 뛰어와 다시 어깨 위에 팔을 올린다. , 자존심 상해.

 

 

"뭐 사 줄까. 우유? 아니다. 밥 대신이면 빵이 좋으려나. 아냐. 그냥 둘 다 먹자."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간지러운 이 느낌이 딱히 싫지는 않았다.

 

 

김민규가 그렇게 나를 쫓다시피 한 게 벌써 며칠 째. 익숙해질 법도 하지만 역시나 하루에도 몇십 번씩 당하더라도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었다.

 

 

누구나 이유 없이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이 있다. 그날이 오늘이라고 생각했던 날, 내내 붙어 있던 김민규가 무슨 일인지 어디론가 가고 보이지 않을 때였다.

 

 

", 이찬."

"?"

"네 나무는 어떻게 생겼냐? 한번 보여 주라."

"그건 갑자기 왜?"

"그냥 궁금해서 그러지. 너 맨날 체육복도 늦게 갈아입고 오잖아."

"미안."

"미안해하지 말고 그냥 보여 주면 되잖아."

 

 

설마 너도 꽃이라도 핀 거야, 벌써? 반에서 껄렁댐을 담당하던 아이들 무리 여럿이 몰려와 주위를 꿰차고 앉아서는 말했다. 체육시간 전에 봤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이 아이들 중 몇몇은 이미 나무에 작은 꽃 두어 개 정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자기들끼리 키득거리며 건 농담 아닌 농담에 아무것도 자라지 않은 등이 평소보다 더욱 시렸다. 옆에 앉은 아이의 차가운 손이 교복 사이로 파고들었다. 맨살에 닿는 손끝의 느낌이 싫어 몸을 뒤틀자 아이는 더욱 과감하게 허리를 더듬었다.

 

 

"쓰읍."

 

 

등 뒤에서 들린 소리와 함께 허리를 지분대던 손이 누군가에 의해 곧바로 내쳐졌다. 사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안 돼. 내가 꽃 새겨 놨어."

"뭐야. 진짜로?"

"아니. 근데 곧 새길 거라서. 다른 새끼 눈 타면 안 돼.

 

 

미친놈. 김민규를 '미친놈'이라고 칭한 두 번째 상황이었다. 나만 그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는지 방금 전까지 더러운 농담을 던지던 아이들도 저와 똑같이 미친놈, 하고 읊조리며 자리를 떴다. 이게 도와 준 건지 뭔지 구분이 잘 가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도와 줘서 고맙다는 생각보다는 수치심이 더욱 크게 몰려왔다. 허벅지 위에 놓인 주먹에 힘이 꽉 들어갔다.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김민규의 손목을 끌고 사람이 잘 드나들지 않는 학교 뒷편으로 거침없이 향했다.

 

 

"너 나랑 잘래?"

"?"

"나 나무 없는 거 알잖아. 굳이 이러는 이유가 뭔데? 내가 불쌍해서 그래?"

"그런 거 아닌데. 이유도 없어."

"지금 나랑 장난해?"

 

 

사실 괜한 자격지심에 성낸 꼴이었다. 예상치 못한 나의 격한 발언에 김민규는 표정이 굳었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를 행하지는 않았다. 마주보고 화를 내자 도리어 당당하게 나오는 김민규의 태도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나였다.

 

 

"너도 내가 다른 사람들이랑 다르니까 그러는 거잖아. 쓸데없이 동정하지 마. 그런 거 필요없어."

 

 

김민규는 아무 대꾸도 없었다. 주인에게 혼난 강아지마냥 입술을 앙다물고 있었다. 나무가 없다는 것을 들켰던 그날처럼, 나는 먼저 김민규를 지나쳤다. 심장이 흥분한 채로 입을 열면 툭 튀어나올 것만 같을 정도로 마구 뛰어댔다. 심장만 뛰면 되는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월요일 아침이었다. 교실 문을 앞두고 한숨밖에 나오지를 않았다. 지난 금요일, 그렇게 쏘아붙여놓고는 김민규를 어떻게 볼까 하는 걱정만 하고 있는 내 모습이 참 우스웠다. 다 내가 자초한 일이고, 나 때문에 생긴 일인걸. 아니, 아니야. 이건 다 쓸데없이 오지랖 부린 김민규 때문이야. 그치만 그때 구해 준 건……. 걱정 반 한숨 반인 상태의 어거지로 연 교실 문이 오늘따라 무겁게 느껴졌다.

 

 

조심스레 발을 들인 교실은 평소와 다른 것이 없었다. 칠판 위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자석들, 사물함 위에 놓인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실내화 한 짝그리고 내 옆이 아닌 원래 자리로 돌아가 있는 김민규. 김민규는 정말 내게 아는 척도 하지 않을 셈인지 그날 하루종일 나에게 말을 걸지도, 보지도 않았다.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정말 모르는 사람을 본 것 마냥 먼저 눈을 피했다.

 

 

나쁜놈…….

 

 

괜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춘기가 온 아이마냥 아무 일도 아닌데도 눈물이 나려고 했다. 아무 일도 아닌데.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결국 김민규에게서 시선을 돌려 운동장을 품고 있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운동장 바깥쪽으로 심어진 벚나무가 꽃샘추위에 몸을 떤다. 그리고 나는 그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들보다 느린 나를 원망했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이 모두 꿈이었던 것 마냥 김민규는 나를 모른 체했다. 꿈인지 현실인지도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그는 무심했다. 말을 섞는 것은 고사하고 시선조차 맞부딪히는 일 한 번이 없었다. 내가 자초한 일이었지만 괜히 시원섭섭한 그런 기분이었다.

 

 

그렇게 싫은 티내도 따라다닐 땐 언제고.

 

 

춘곤증이 몰려왔는지 평소에는 졸지도 않더니 꾸벅꾸벅 고개가 떨어지는 김민규가 보인다. 금방이라도 책상에 닿을 것만 같았다. 날이 좋아 열어둔 창문 사이로 봄바람과 함께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봄바람은 이렇게 따뜻한데 가슴 한구석은 왜 이리 시려운지. 고개를 돌려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생각이 깊어질 때마다 보던 그곳. 그곳에는 어느새 벚꽃을 손에 쥔 나뭇가지들이 있었다. 봄이다. 봄이었다. 고 작은 벚꽃들은 스쳐가는 바람에도 아슬아슬 가지 끝에 용케도 잘 붙어 있었다. 그들이 만개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낀다.

 

 

그 해 봄은 굉장히 따뜻했다.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예상대로 벚꽃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게 만개한 상태였다. 연분홍빛 벚꽃잎이 존재하는 나무 아래 낡은 벤치에서 나는 생각에 잠기고는 했다. 그 생각의 중심은 역시나 김민규였던 것이다. 봄 타나. 바람이 쉬이 불었다. 꽃잎이 휘날려 떨어진다.

 

 

발등 위로.

 

손등 위로.

 

허벅지 위로.

 

어깨 위로.

 

 

온 군데로 벚꽃이 떨어지는 통에 나는 눈을 감았다. 바람이 멎은 듯해 눈꺼풀을 올리자 방금까지 공을 쫓고 있던 김민규가 내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환상인가? 코앞까지 다가온 김민규가 손을 뻗었다. 숨이 멎는다. 머리 위로 뻗어진 손이 벚꽃 한 잎을 집어올린다. 작은 벚꽃과 김민규. 그 아름다운 조화를 한눈에 담기가 힘들어 나는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온통 벚꽃 투성이였다.

 

 

"아직도 화났어, 찬아?"

"…… 아니."

 

 

부끄러워서 그래.

 

 

"미안해."

 

 

너한테 그런 생각 들게 하려고 했던 건 아닌데. 이런 상황이 부끄러운지 김민규의 두 볼이 약간은 상기되어 있었다. 뒤이어 침묵이 따랐다. 벚꽃잎만 가득한 그 사이를 뚫고 내게 손이 내밀어졌다.

 

 

"가자. 종 치겠다."

 

 

손을 잡았다. 그를 따라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끝날 무렵의 점심시간의 운동장은 텅 비어 있었다. 그에 나는 내 손을 감싼 김민규의 단단한 손을 더욱 힘있게 잡았다. 그래. 봄이었다.

 

 

 

 

 

이제 스테먼을 제외하고는 나 빼고 다들 발현이 끝난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고 몇몇 아이들의 등에는 이미 형형색색의 꽃들이 피어났다. 그걸 자랑이라고 여기는 듯한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쓸데없는 남고생의 과시욕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내 등에 나무가 있었더라면 김민규의 꽃을 피어나게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뭐 해?"

", 아니. 그냥."

 

 

김민규도 양반은 못 됐던가. 그 봄날 이후로 김민규는 대놓고 내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를 따라다녔을 때처럼 김민규는 이번에는 아예 자기 책상을 들고 와 짝꿍의 책상과 바꿔 버렸고 자리가 바뀌었다는 뻔뻔한 거짓말을 치는 김민규에 순진한 짝꿍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김민규의 자리에 가 앉은 것부터가 그 관심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나 또한 그 관심이 싫지 않았다.

 

 

"내가 이미 발현했으면 네 꽃도 피웠을까?"

"?"

 

 

뜬금없는 내 질문에 소스라치게 놀란 김민규가 순식간에 귀끝을 붉히는 모습이 퍽이나 귀여워 나는 웃음을 흘렸다. 사실 허무맹랑한 이야기일지도 몰랐다. 내가 언제 발현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난 네 등에 나무가 있든 없든 상관없어."

"진짜?"

"."

 

 

때마침 2교시 시작 종이 울린다. 주섬주섬 교과서를 챙기는 아이들과는 반대로 내 쪽으로 다가온 김민규가 내 귀에 대고 속삭인다.

 

 

"좋아해."

 

 

그 말을 남긴 김민규는 내게서 멀어져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교과서를 챙겼다. 이번에는 내 얼굴이 훅 달아올랐다. 진짜, 미친 거야. 미친 게 분명해. 김민규도, 나도. 장난식으로 나눈 이야기지만 마음 한구석으로는 찝찝하기도 했다. 느려 터진 나를 원망해보아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오늘따라 등허리가 아렸다.

 

 

 

벚꽃이 지고, 봄이 지났다. 7월의 여름이 되자 언젠가부터 열병이 나기 시작했다. 불덩이 같은 몸이 자꾸만 시야를 흐렸다. 어질어질한 머리 때문에 교과서의 지문조차도 읽혀지지가 않았다. 여름 감기인가. 김민규는 그런 나를 보고 걱정스러움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쉬라고 말했다. 나는 괜찮다며 애써 웃어 보이고는 아스라이 멀어지려는 정신을 붙잡았다. 사실 괜찮지 않았다. 온몸이 바늘로 찔리는 듯했다. 결국 힘겨운 발걸음을 옮겨 보건실로 향했다. 대충 상태를 들은 선생님은 내게 발현이 되었냐 물었다. 혹시 모르니 병원에 가 보라는 말을 덧붙이셨다. 어쩌면, 뒤늦은 발현일 수도 있다고.

 

 

 

 

* * *

 

 

 

 

책상 위에 엎드려 끙끙 앓던 모습을 본 게 마지막이었다. 그날 이후로 옆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이찬이 보건실에 간 동안 급히 할 일이 생겨 교내를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오니 가기 전까지만 해도 책상 옆에 걸려 있었던 이찬의 검은색 책가방이 사라지고 없었다. 인사도 못 했는데. 벌써 찬이가 학교에 나오지 않은 지 일주일 째였다.

 

 

"선생님, 이찬 어디 갔어요?"

 

 

아침 조례 시간, 평소 이찬과 꽤나 친분이 있는 걸로 보였던 아이가 손을 들었다. 조용했던 교실이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해진다. 그러게. 걔 요새 학교 안 나왔잖아. 뭐야, 자퇴한 거 아니었어? 아무 말도 없길래 그런 줄 알았지.

 

 

"찬이는 개인 사정이 있어서 당분간 학교를 못 나오게 됐다. 언제 올지는 나도 모르니까 혹시 연락처 있는 사람은 개인적으로 연락이라도 해 보고."

 

 

담임도 정확한 이유는 모르는 게 분명했다. 잠시 아이들 입에 오르내리던 찬에 대한 아이들의 관심은 이내 사그라들었다. 그 아이를 생각하는 것은 나뿐이었다. 한순간의 달콤한 꿈이 아니었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딱 한 자리가 비어 있는 교실,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는 날이었다.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책상에 접어 두었다. 오늘 수업은 이미 물 건너 간 듯 싶어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찬이 항상 지켜보고 있던 그곳. 그곳에는 이미 꽃잎 대신 푸른 잎이 무성해진 벚나무가 존재했다. 여름 햇살이 쨍하게 비친다. 어느새, 여름이었다.

 

 

 

 

생각없이 책상 서랍에 집어넣은 손에 무언가 집혔다. 야무지게 접은 하얀 쪽지였다. 난 이런 거 넣어 놓은 적 없는데. 누군가 접어 둔 흔적이 보여 쪽지를 펼쳤다.

 

 

[기다려 줘]

 

 

분명 이찬이었다. 언젠가 곁눈질로 힐끔 보았던 이찬의 교과서에 적힌 필체와 같았다. 내가 자리에 없던 사이, 그러니까, 이찬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날 넣어 놓은 것이 분명했다. 신기하게도 내내 가슴 속을 막고 있던 무언가가 떨어져나간 기분을 느꼈다.

 

 

 

여름방학식을 마쳤다. 그 아이를 보지 못한 것도 벌써 한 달 째였다. 오늘이 지나면 최소한 한 달 이상을 더 못 볼 텐데. 지금까지 잘 참아 왔건만 유독 그리워지는 날이었다. 형식적인 여름방학식을 마치고 삼삼오오 모여 다들 빠져나간 교실이 조용했다. 이른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여름 하늘이 맑다. 텅 빈 교실을 둘러보는 시선의 끝은 역시나 한 달 내내 주인을 잃은 자리였다. 괜히 책상을 손으로 쓸어 보았다. 그의 빈자리를 더욱 크게만 느껴지게 하는 것만 같아 괜히 울적해졌다. 저멀리 누군가 걸어와 교실 앞에 멈춰서서는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린다. 교실에 물건을 두고 간 아이인가 싶어 돌아본 문 앞에는, 그렇게 기다렸던 그가 서 있었다.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한 달이라는 공백 이후 마주친 이찬은 교복을 입고 있지 않았고, 어딘지 모르게 많이 성숙해진 느낌이었다. 살이 빠진 얼굴에서 묘하게 느껴지는 색기가 조금은 어색하게 다가왔다.

 

 

"미안. 좀 늦었지."

 

 

이찬이 문을 닫고 한 걸음씩 내게 걸어온다. 몇 발자국 앞에 다시 멈춰선 이찬이 뒤를 돌아 이내 몸보다 조금 큰 사이즈의 윗옷을 걷어올린다. 반쯤 들어올려진 옷 사이로 하얀 등판이 드러났고 처음 그의 속살을 보게 됐던 그날과는 다르게, 연한 갈색의 나뭇가지가 뻗쳐 있었다. 옷을 내린 이찬이 붉어진 볼을 하고선 눈을 마주쳐온다.

 

 

"발현이 늦으니까 고통도 남들보다 더 오래가더라."

"……."

"보고 싶었어."

 

 

그 말에 자석처럼 이끌리듯 그에게 다가가 무작정 입을 맞췄다. 이찬은 피하지 않고 오히려 입맞춤에 순순히 응하며 내 목에 팔을 둘러온다. 그대로 책상 위로 이찬을 조심스레 눕혔다. 1cm도 채 되지 않는 거리 사이 마주치는 시선에 스파크가 일었다. 서로에게 홀린 것마냥 다시 입을 맞추며 나는 하나둘 그의 옷을 벗겨낸다. 그에게서 벚꽃 향기가 나는 것만 같았다.

 

 

 

작은 손이 위태롭게 책상 끝을 잡았다. 흔들리는 몸에 따라서 균형이 맞지 않는 책상이 덜컹덜컹 소리를 울렸으나 그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다. 학교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을 찾기에 급급했으니. 책상 위에 엎어져 있는 찬의 뒤로 민규가 쉴새없이 움직였다.

 

 

", 흐읍, , , 민규, 하윽."

"소리, 내도 돼."

 

 

어차피 학교 안에 우리밖에 없어. 여실히 드러난 목덜미 뒤에 입술을 연신 찍어대며 말하자 젖은 쾌락이 가득한 찬의 신음소리가 조금 더 크게 교실 내부를 울렸다. 아흐, , , 아아! 창문 사이로 쨍하게 비치는 햇살이 새로이 자라난 나무를 따뜻하게 감싼다. 절정에 다다르는 소리와 동시에 찬의 등 위로 땀방울이 투둑, 툭 떨어졌다. 끈적하고 불투명한 액들이 교실 나무 바닥으로 흩뿌려진다. 절정과 함께 찾아온 정적. 그 사이로 높낮이가 다른 거친 호흡이 조화를 이룬다.

 

 

이윽고 찬의 나뭇가지에 분홍색 꽃 하나가 피어나 있었다. 벚꽃이었다. 지쳐서 헐떡이는 찬의 날개뼈 부근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꽃 한 송이를 손으로 매만져 보던 민규는 이유모를 경이로움에 사로잡혀 그 위에 입술을 가볍게 맞추었다. 뒤늦은 그들만의 봄이었다.

 

 

"벚꽃, 피었네."

 

 

조금 늦어도 조급해하지 말아라. 단지 서투른 것뿐이다. 기다린 만큼, 기대한 만큼 그것은 곧 당신의 품에 들어가 안길 테니. 그렇기에 그들은 기억할 것이다. 기다려 왔던 열아홉의 봄은 이토록 찬란하고도 아름답게 빛났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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