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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찬] 열일곱

열하나 2017. 9. 11. 07:49



또 같은 꿈을 꾸었다. 그 꿈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열일곱이다.


비가 내린다.
세상은 어둡다.
비는 그칠 줄 모른다.
끝없는 암흑이다.


우리는 빗속이다. 군데군데 찢어진 노란 비닐우산 하나. 그에 걸맞는 녹슨 손잡이. 여기저기 손때가 타고. 고무가 덜렁거리는. 쏟아지는 비를 함께 맞는다. 고스란히 담는다. 우리는 비처럼. 아니 비처럼. 고집스럽게 서로를 마주하고 다시 비처럼. 꼭 비처럼. 비를 맞는다. 젖어간다. 최한솔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알고 싶지 않다. 생각보다 마른 어깨가 축축히 젖어들어간다. 차마 내게 손을 뻗지 못한 채 차가운 손잡이만 쥐고.


불행은 전염돼. 사랑은 탈출구가 될 수 없어. 우린 어른이 아니라서. 그래서 도망칠 수조차 없어. 나는 벼랑 끝에 서 있고 너를 안고 추락할 못된 마음도 있어. 그럼 넌 말하겠지. 괜찮다고. 나는 네가 괜찮은 게 못 견디게 싫어. 그러니까 괜찮지 마. 내 불행에 동조하지 마. 너는 내 불행이 되지 마.


우리는 빗속이다.
비는 그칠 줄 모르고
세상은 여전히 캄캄하다.


네가 나를 이유로까지 불행하지 않았음 해.


제발. 너만큼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건 나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이었다.





열 일 곱
w. 열하나







A.



나의 열일곱은 최한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최한솔에 대해 할 말이 그리 많지 않다. 원체 남을 신경쓰지 않는 성격이었던 탓일까. 최한솔은 애가 참 묘했다. 나도 내 성격 좆같은 사실 정도는 아는데. 그런 것을 아예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실실 웃다가 뜬금없이 날씨 욕을 내뱉어도. 이쪽 길로 가다가 되돌아 다른 길로 향해도. 반응은 그저 그랬다. 그래, 그러자. 최한솔의 성격이 원래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최한솔이 다른 이와 이야기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나는 그 아이가 그렇다 할 확신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담배를 주로 피우고는 했다. 이름도 모르는 브랜드의 것. 조용히 건네받은 그것을 손가락 위에 아슬아슬 걸쳐 놓는다. 순백. 후의 옅은 열기와 재. 최한솔은 내가 죽는다면 이유는 폐암일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어쩌면 내 사인은. 내 마지막의 이유는 매캐한 연기가 아닌, 그 이후에 남는. 지독한 어둠일지도.


한 번 최한솔이 헛소리를 한 적이 있다. 화학 물질이 잔뜩 밴 몽글거리는 연기를 뱉은 날. 최한솔은 구름을 보았다고 했다. 금방 폭우가 쏟아질 것만 같은. 축축한 구름. 그런 말을 내뱉는 모습이 사뭇 진지해서 나는 깔깔 웃었다. 최한솔의 얼굴빛에 후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나는 그럴수록 더욱 크게 웃었다. 숨이 차고. 눈물이 고이고. 담뱃재를 터는 것조차 깜빡할 정도로. 지나치게. 그리고 최한솔이 싫어하는 말을 꺼냈다.


"누가 예술 하는 집 아들 아니랄까 봐. 감성도 유전인가 보지?"


그 말을 들은 최한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실컷 웃고 난 후의 나는 또다시, 블랙아웃.


깊고 깊은 구멍 속으로 들어갔던. 나의 암흑은 최한솔이었다. 최한솔은. 그랬다.



B.



익숙한 길이 아닌 음침한 곳이었다. 발을 뗄 때마다 쾌쾌한 냄새가 뒤를 따른다. 누군가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지. 그러한 악취도 무덤덤해질 정도가 되었을 때 즈음에 나는 마주쳤다.


날개.


분명 어릴 적 보았던 진부한 동화책이나 영화에서 나올 법한 천사의 것이었다. 다만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얼룩덜룩한 페인트로 그려졌다는 것. 누군가 스프레이 따위로 뿌려 놓은 듯한 모양새였다.


천사의 날개는 하얗다. 달빛을 받는 순간 사금파리마냥 조각조각 나뉠 것만 같을 정도로. 희고 깨끗하다. 언젠가 최한솔과 길을 걷다 마주친 조형물을 보고 느낀 것이었다.


"넌 저런 거 안 만드냐?"
"실없는 소리 하고 있네, 또."
"만들면 우리 집에다 하나 두려고 했지."
"저딴 거 둬서 뭐 하게."
"깨끗하잖아. 하얗고."
"네가 그런 취향인 줄은 몰랐는데."


근데 저것도 언젠간 더러워질 거야. 먼지 쌓이고 녹슬겠지. 깨끗한 건, 그만큼 더러워지기도 쉬운 거니까.



그렇다면 깨끗함과는 거리가 먼 이 날개는? 원색의 페인트가 잔뜩 묻은 이 날개는? 더이상 더러워질 수도, 깨끗해질 수도 없는 이 추악한 아름다움은?



이미 굳어버린 더러운 날개는 벽에 달라붙어 움직일 수가 없다. 날아오를 수 없다.



C.



"좆같은 새끼야. 위선 떨지 말고 똑바로 말해."


뭐든지 다 괜찮은 척하지 마. 날 생각하지 마.


"개같으면 개같다고, 시발아!"


내가 너에게 접시를 던질 때에도.


"최한솔."


식탁 아래로 몸을 감추고. 소리치란 말이야.


"다 떠들었냐?"
"…."
"가자."


내가 덜 괴로워할 수 있도록.



D.



따끔거렸다. 손바닥 위에 잘 보이지도 않는 상처가 생겼다. 죽 그어진 사선 위로 몽글몽글 핏방울이 맺힌다. 흐트러짐 없이 피어나는 처절한 아름다움. 다른 손을 들어 마구 문대 버렸다. 결국 남은 것은. 벌어지고 번진 상처 뿐이었다.



E.



누군가가 필요했던 게 아니었을까. 최한솔은 그런 나를 잘도 알고 있었다. 그 모든 순간에 나는 외로워했다. 사무치는 외로움을 묻기 위해 더욱 있는 힘껏 발악했을 열일곱. 나는 최한솔이 나를, 내가 최한솔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 잘난 얼굴에 생채기를 내고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던 것과는 심히 모순적이게도.



나는 최한솔을 사랑했을까.
최한솔은 나를 사랑했을까.


우린 그때 사랑했을까.
그래서 그토록 치열하게.
다쳤던 걸까.



F.



최한솔은 예술가의 아들이었고 나는 평범한 양아치였다. 나는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아무데서나 침을 뱉고, 예술가를 싫어하고, 그런 예술가의 아들과 섹스를 했다. 애정을 갈구하는 열일곱의 눈동자는 우주만큼이나 넓었다. 최한솔은 그렇게 내게 무언의 눈빛을 보내고는 했다. 그러나 우주는 넓고 신호를 받을 행성은 이미 무의미했다. 존재하지 않았다. 돌이킬 수 없는 블랙홀 속에,


무(無), 였을 뿐이다.


나는 결코 내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G.



우리의 섹스는 언제나처럼 마무리 단계였다. 내가 울 때면 최한솔은 가만히 기다렸다. 씨발. 개같아. 나는 천박한 욕짓거리를 내뱉으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벽을 차고, 물건을 집어던지고. 어느새 핏물이 고인 손을 잡고 최한솔은 이마와 이마를 맞대며. 호흡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그동안 최한솔은 내게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 흔한 위로의 말조차.


이유는 둘 다 알지 못했다. 알고 싶지 않았다. 아는 게 없었기에. 싸우고, 또다시 키스를 나누었다.  나는 최한솔의 밑에서 또다른 의미로 얼굴을 붉혔다. 몸이 달아올랐다. 아직 완전한 모습이 되지 못한 그 얇은 가슴팍을 끌어안으며. 나는 또다시 울었다.


정상 궤도를 벗어난 열일곱의 길은 언제나 외롭고는 했다.



H.



우리의 공간. 사랑하지 않은 남자를 불러들여와 섹스를 했던 날, 최한솔은 내 앞에서 처음으로 주먹을 썼다. 어쩐지 찝찝한 몸을 벽에 기대 연기를 내뱉으며 생각했다. 나는 남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섹스를 했고, 최한솔은 내가 사랑하지 않은 남자를 팼다. 그렇다면 최한솔은 나를 사랑하는 걸까. 이렇게까지? 어쩐지 울고 싶어졌다.


"이럴 땐 화를 내는 거야."
"……."
"모르는 것 같아서."


이마를 맞대고 마주친 최한솔의 눈은 울고 있었다. 뼈와 살이 맞부딪히던 그 감각이 생경한 손을 잡았다. 미세한 떨림. 최한솔은 분명 울고 있었다. 다 터버린 생기 하나 없는 입술이 가시라도 되는 것 마냥 타는 듯한 속을 찔러댔다. 나를 좋아해 줘. 나를 사랑해 줘. 최한솔의 머리칼을 쓰다듬고 이내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최한솔의 떨리지 않는 긴 속눈썹도. 집중하느라 힘이 들어간 미간도. 내가 일부러 네게 상처를 주는 이유는……. 나는 결국 마무리되지 않은 생각을 지웠다. 복잡한 건 생각하지 않는 나이, 열일곱이었으니까.



I.



“네가 나를 이유로까지 불행하지 않았음 해.”


최한솔과 헤어졌다.
비가 내렸다. 내 주위를 따라, 그곳에만.
그러다 문득 울었다.
그렇게 헤어졌다.



J.



사랑에 '빠진다'라는 말은 참으로 적확한 표현이다. 그 안으로 미끄러지거나, 발을 헛디디거나, 넘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랑에 빠져 몸을 내던진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깊고 깊은 구렁텅이 속으로. 이내 끝없는 곳에 잠식되고 마는 것이다. 동정에서 비롯된 것은 더욱 그렇다. 최한솔은 불쌍했다. 도리어 최한솔은 나를 동정했을지 모른다.


시들어버린 꽃을 감싸안는 빗물처럼 최한솔은 나를 보듬었고, 머금었고, 사랑했다. 그 속에서 나는 홀로 두려움을 키워나갔다. 두려움은 가장 강력한 감정이었다.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그렇게 하나 둘 죽어나갔다. 마지막 남은 것은 최한솔이었다. 분명 최한솔은 죽어가고 있었다. 나로 인해. 나의 두려움으로 인해. 나의 불행으로 인해. 지금쯤 최한솔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나의 <마지막 희망>이었음을. 그리고, 우리는 사랑을 했었음을. 그 무엇보다 초라하고 어렸지만, 그것 또한 우리가 나눈 사랑이었음을.


내가 접시를 던지며 울었던 이유와 네가 고스란히 맞으며 웃었던 까닭은. 어른이 되어. 어른이었다가 다시 열일곱이 되어.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 뿐, 나는 더 이상 남길 말이 없다.



K.



추신.


위성은 행성 주위를 돌아.
언제나, 같은 궤도로, 그 자리에서.
위성과 행성은 함께 있어도 만날 수는 없거든.


「35910, 530184」














*35910 : 오랫동안 날 생각해 줘.
*530184 : 평생 너를 그리워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