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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찬] 여름 약속
열하나
2016. 11. 29. 00:10
여름 약속
열 하 나
여름방학을 맞은 순영은 시골에 계신 할머니 댁으로 향했다. 배낭 안에 생필품 몇 개만 쑤셔넣고 무작정 집을 나온 것이다. 그의 시골 집은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곳에 있었는데, 마을을 휘이 한 바퀴 둘러본 순영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대충 초등학생 시절로 어림잡아 어릴 적에 왔던 이후로는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지만 마을의 모습이 옛 기억과 크게 달라진 건 없었기 때문이었다. 순영은 할머니 댁에 대충 짐을 풀어놓고 어렸을 때 할머니 댁에 오게 되면 항상 가곤 했던 계곡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질오염이 어쩌니하는 사람들의 말들이 무색할 정도로 계곡은 맑았다. 아무도 없는 계곡 앞 큰바위 위에 앉아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계곡물을 보며 졸졸대는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순영은 이보다 더 좋은 힐링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결국 뒤로 벌러덩 드러누운 그는 적당히 따뜻하게 쏟아지는 햇빛을 받으며 눈을 감았다. 한참을 누워 있었더니 어디에선가 통, 통 하며 정체 모를 소리가 순영의 고막을 울렸다. 물에 무언가가 던져지는 소리 같았다.
'분명 아깐 아무도 없었는데…'
순영은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언제부터 있었던 것인지 멀지 않은 바위 위에서 한 남자아이가 작은 돌들을 계곡 물 속으로 가볍게 던지고 있었다. 순영은 그 남자아이가 하는 모양새를 지켜보다가 일어나 조심스레 그쪽으로 다가가 앉았다. 순영이 다가와도 미동도 않던 아이는 그가 옆에 앉자 잠깐 힐끗 보고는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려 계곡에 돌 던지기를 반복했다. 영문 모를 행동을 하는 남자아이를 순영은 말없이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또래인 것 같았지만, 조금 더 앳되보였다. 미묘하게 차가운 기운도 감돌았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드는 순영이었다.
"이름이 뭐야?"
남자아이는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에 순영은 굴하지 않고 잠깐의 공백 이후 다시 말을 걸었다.
"여기 자주 와?"
"…."
그제서야 아이는 돌을 던지던 걸 멈추고 순영을 바라보았다. 저절로 눈을 마주치게 됐는데,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홀린다고나 할까. 멍해지려는 정신을 겨우 붙잡고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의 시선은 순영보다 조금 밑에 있어 그를 살짝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시선이 맞닿은 이후 눈도 한 번 깜박이지 않던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 추워.
여름이 다가오는 날씨에, 춥다니. 순영은 조금 이상한 아이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조그마한 불길이 장작을 휩싸고 돌아 그 크기를 키워 일렁였다. 어둑어둑해진 밤, 순영은 아이의 옆에서 길다란 나뭇가지로 괜히 장작을 여기저기 쑤셔댔다. 벌써 이것을 반복한 지 대략 일주일 정도가 지났다. 일정한 시간이 되면 계곡으로 가 처음 만난 날 아이가 그랬던 것처럼 작은 조약돌들을 계곡 물 속으로 던지고는 했다. 퐁당거리는 소리가 지루해질 때 즈음,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뒤에 서있는 아이를 발견하면 바지를 털고 일어나 그의 옆을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다. 사는 곳도 모르고, 이야기를 오래 나누지도 못했다. 대충 분위기를 잡고 이름을 물어볼라치면 아이는 못 들은 척 자리를 떠버렸다. 그러나 아이는 순영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서서히 순영에게도 조금이나마 미소를 띄웠다.
크게 모난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말이 없을 뿐이다. 순영은 왠지 모르게 그 아이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더운 여름날임에도 불구하고 순영은 아이와 가까워지려 애썼다. 그럴수록 아이는 거리를 두려 했다. 순영이 자연스럽게 손을 잡으려 하면, 아이는 급히 손을 빼내며 미안한 듯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스킨쉽을 싫어하나. 허한 느낌의 손에 차가운 기운이 맴돌았다. 손을 아무리 털어봐도 냉기는 가시질 않는다. 차가운 것은 아이의 몸뿐만이 아니었다. 아이의 옷은 날이 갈수록 젖어갔다. 옷깃 끝부터 배, 가슴팍. 순영은 아이의 옷이 젖어가는 것이 물장난 때문이 아닐까 추측했다. 그러나 작은 조약돌은 던지는 것만으로 저렇게 옷이 젖는다는 것은 과히 불가능하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순영은 더욱이 아이의 정체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햇살이 코 끝을 간지럽히던 늦은 아침, 집안에 숟가락과 오래된 양철 밥그릇이 부딪혀 나는 소리가 쨍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할머니는 순영의 쌀밥 위에 조각낸 반찬을 올려 두었다. 밥 위에 놓여지는 반찬은 순영의 입 속으로 사라지기 무섭게 또다시 생겨났다. 오전의 나른한 적막 사이로 할머니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누굴 만나고 다니길래 만날 그렇게 싸돌아 댕겨. 이 주변에는 네가 놀 만한 데가 없을 틴디."
"어?"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밥을 한 숟갈 우겨넣었다.
"같이 놀러 댕기는 애라도 있는 것이여?"
순영은 머릿속으로 아이를 떠올렸다. 시리도록 흰 피부에 대조되는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그에 걸맞는 깊은 눈동자.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가늠조차 불가능한 항상 똑같은 표정. 오늘은 꼭 이름을 물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있잖아."
계곡물 속 자유로이 춤추는 물고기 한 마리에게 내내 엉켜있던 시선이 천천히 순영에게로 방향을 바꾸었다. 깊은 눈. 여전히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깊은 눈이었다.
"넌 이름이 뭐야?"
"…."
"난 권순영이야."
알아, 권순영. 감나무 밑 파란 지붕 집.
"어?"
아이에게 말해 준 적은 없었다. 처음 제대로 들어보는 아이의 목소리에 놀란 것도 잠시 그가 자신의 집을 알고 있다는 것에 의문을 품었다. 어떻게 알았어?
"그냐앙,"
그냥, 알아. 아이가 자신의 집 주소를 안다는 사실만 알아낸 채 그날도 순영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아이의 옷은 날개뼈를 드러낼 정도로 젖어있었다.
'내... 올... 게.'
'응...'
꿈을 꾸었다. 형체는 작았다. 총 두 개였다. 익숙한 바위. 순영의 머릿속을 약하게 울렸다. 어린아이인가? 작은 형체 둘은 그들만큼이나 조그마한 조약돌을 물 속으로 던지며 놀고 있었다. 분명 물에 젖은 옷은 보이는데, 얼굴만 보이질 않는다. 그 부분만 기억에서 도려낸 것처럼. 오래된 테이프를 꺼낸 듯 끊기는 목소리는 무슨 내용인지도 모를 정도였다. 곧 한 아이가 바위에서 일어나 저 멀리 사라진다. 멀리. 저 멀리로…. 그리고 남은 아이는 물에 휩싸여 사라지고 만다.
그날부터 비가 세차게 내렸다. 장마의 시작인지. 순영은 한동안 계곡에 나가지 못했다. 물이 불어나 위험하다는 할머니의 만류 때문이었다. 그 애는 나왔을까? 빗방울이 마당의 흙을 파내는 모습을 보며 찝찝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꿈. 형체. 조약돌. 계곡. 그리고 지워진 얼굴. 순영은 낡은 우산 하나를 챙겨 들고 곧장 계곡으로 향했다. 귓등을 때리던 할머니의 외침은 빗소리에 파묻혀 어디론가로 사라지고 말았다.
있다. 아이는 오늘도 있었다. 온몸에 비를 맞으며. 계곡물이 발끝에 닿을 정도로 불고 흙탕물이 되었지만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물에 젖은 조약돌을 던져대고 있었다. 성큼성큼 다가가 아이의 마른 어깨를 돌렸다. 손 안에 남아있는 빗물이 찝찝했다.
"너 미쳤어? 위험하게 이게 뭐하는 짓이야!"
"… 네가 약속했잖아."
"뭐?"
"내일도 온다고 했잖아. 네가 그랬잖아!"
순영의 눈동자가 혼란스러움으로 가득했다. 점점 거세지는 빗줄기가 검은 우산을 사정없이 때려온다. 머리가 띵해진다. 비가 우산이 아닌 머리를 때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이를 마주한 몸에 점점 열이 올랐다.
약속했잖아….
약속? 순영이 의문을 가졌다. 한껏 격양되어있던 목소리가 한층 누그러져있었다. 기운 넘치게 내리는 비를 온몸으로 받아낸 아이의 옷은 푹 젖어 더러워져있었다. 마치 모든 것을 쓸어버릴 듯 불어난 계곡의 흙탕물처럼. 아이의 젖은 옷은 물 속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내 이름,"
아이가 입을 열자 바위를 덮치는 성난 계곡의 소리를 포함한 주위의 모든 소리가 멈추었다. 그저 순영만을 눈에 담고 있는 아이와 그런 아이를 품으려 한 순영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찬이야."
아이의 등 뒤로부터 거센 바람이 훅 들이닥쳤다. 바람과 함께 타고 와 순영의 얼굴을 때리는 수많은 빗방울들. 순간 대처하지 못한 순영이 눈을 꼭 감고 우산을 겨우 앞으로 들이밀자 빗방울은 우산에 후두둑 튕겨나간다. 바람이 서서히 멎었다. 꼭 감고있던 눈을 뜨고 들고있던 우산을 올리자 순영은 주위를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앞에 서 있던 아이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이찬.
꿈과 아이, 그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아낸 듯 했다.
그날 밤 장맛비를 온몸으로 맞았던 순영은 고열에 시달렸다. 헛것이 보이기도 했다.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 자각도 하지 못하며 순영은 환영을 보았다. 찬이었다. 오늘도 익숙한 바위. 이전에 꿨던 꿈의 배경이었다. 그러나 더욱 선명한, 꿈. 아니 기억.
'내일도 올게.'
'응, 꼭 와! 기다리고 있을게.'
내일도 온다며 먼저 일어난 아이는 순영 자신이었다. 어릴 적의 그는 다른 아이와 함께였다. 그리고 그 아이는, 그래. 찬이 틀림없었다. 어릴 적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다르지 않은 얼굴이었다. 어린 순영은 인사를 건네며 저 멀리로 사라졌고 순영이 사라진 곳에는 머지않아 비가 후두둑 내리기 시작한다. 비를 온몸으로 맞던 어린 찬은 그대로 물 속으로 첨벙 뛰어들고 말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잊혀진 기억을 다시 꺼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자신을 걱정스레 내려다보는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이었다. 얹어진 물수건이 뜨끈했다. 할머니의 손이 다가와 이마 위의 수건을 거두고 손을 놀렸다. 다시 올라온 수건이 시원하다. 아직도 생생한 '기억'을 떠올리며 마른 입술을 열었고 사이에서는 잔뜩 쉰 소리가 흘렀다.
"할머니, 혹시 이찬이라고 알아?"
"찬이? 알다마다. 갸가 저 밑 과수원 아들인디. 저번 여름 이맘때쯤에 저어기 계곡에서 놀다가 장맛비에 물이 불어서 빠져 죽었던 애여."
끔찍한 일이지, 끔찍한 일이야…. 순영은 할머니의 읊조림을 귀에 흘려 들으며 정신을 서서히 놓다 이내 눈을 감았다. 아, 그 해 여름의 약속은 참 지독하게도 지켜졌구나.
열 하 나
여름방학을 맞은 순영은 시골에 계신 할머니 댁으로 향했다. 배낭 안에 생필품 몇 개만 쑤셔넣고 무작정 집을 나온 것이다. 그의 시골 집은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곳에 있었는데, 마을을 휘이 한 바퀴 둘러본 순영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대충 초등학생 시절로 어림잡아 어릴 적에 왔던 이후로는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지만 마을의 모습이 옛 기억과 크게 달라진 건 없었기 때문이었다. 순영은 할머니 댁에 대충 짐을 풀어놓고 어렸을 때 할머니 댁에 오게 되면 항상 가곤 했던 계곡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질오염이 어쩌니하는 사람들의 말들이 무색할 정도로 계곡은 맑았다. 아무도 없는 계곡 앞 큰바위 위에 앉아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계곡물을 보며 졸졸대는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순영은 이보다 더 좋은 힐링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결국 뒤로 벌러덩 드러누운 그는 적당히 따뜻하게 쏟아지는 햇빛을 받으며 눈을 감았다. 한참을 누워 있었더니 어디에선가 통, 통 하며 정체 모를 소리가 순영의 고막을 울렸다. 물에 무언가가 던져지는 소리 같았다.
'분명 아깐 아무도 없었는데…'
순영은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언제부터 있었던 것인지 멀지 않은 바위 위에서 한 남자아이가 작은 돌들을 계곡 물 속으로 가볍게 던지고 있었다. 순영은 그 남자아이가 하는 모양새를 지켜보다가 일어나 조심스레 그쪽으로 다가가 앉았다. 순영이 다가와도 미동도 않던 아이는 그가 옆에 앉자 잠깐 힐끗 보고는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려 계곡에 돌 던지기를 반복했다. 영문 모를 행동을 하는 남자아이를 순영은 말없이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또래인 것 같았지만, 조금 더 앳되보였다. 미묘하게 차가운 기운도 감돌았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드는 순영이었다.
"이름이 뭐야?"
남자아이는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에 순영은 굴하지 않고 잠깐의 공백 이후 다시 말을 걸었다.
"여기 자주 와?"
"…."
그제서야 아이는 돌을 던지던 걸 멈추고 순영을 바라보았다. 저절로 눈을 마주치게 됐는데,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홀린다고나 할까. 멍해지려는 정신을 겨우 붙잡고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의 시선은 순영보다 조금 밑에 있어 그를 살짝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시선이 맞닿은 이후 눈도 한 번 깜박이지 않던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 추워.
여름이 다가오는 날씨에, 춥다니. 순영은 조금 이상한 아이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조그마한 불길이 장작을 휩싸고 돌아 그 크기를 키워 일렁였다. 어둑어둑해진 밤, 순영은 아이의 옆에서 길다란 나뭇가지로 괜히 장작을 여기저기 쑤셔댔다. 벌써 이것을 반복한 지 대략 일주일 정도가 지났다. 일정한 시간이 되면 계곡으로 가 처음 만난 날 아이가 그랬던 것처럼 작은 조약돌들을 계곡 물 속으로 던지고는 했다. 퐁당거리는 소리가 지루해질 때 즈음,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뒤에 서있는 아이를 발견하면 바지를 털고 일어나 그의 옆을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다. 사는 곳도 모르고, 이야기를 오래 나누지도 못했다. 대충 분위기를 잡고 이름을 물어볼라치면 아이는 못 들은 척 자리를 떠버렸다. 그러나 아이는 순영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서서히 순영에게도 조금이나마 미소를 띄웠다.
크게 모난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말이 없을 뿐이다. 순영은 왠지 모르게 그 아이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더운 여름날임에도 불구하고 순영은 아이와 가까워지려 애썼다. 그럴수록 아이는 거리를 두려 했다. 순영이 자연스럽게 손을 잡으려 하면, 아이는 급히 손을 빼내며 미안한 듯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스킨쉽을 싫어하나. 허한 느낌의 손에 차가운 기운이 맴돌았다. 손을 아무리 털어봐도 냉기는 가시질 않는다. 차가운 것은 아이의 몸뿐만이 아니었다. 아이의 옷은 날이 갈수록 젖어갔다. 옷깃 끝부터 배, 가슴팍. 순영은 아이의 옷이 젖어가는 것이 물장난 때문이 아닐까 추측했다. 그러나 작은 조약돌은 던지는 것만으로 저렇게 옷이 젖는다는 것은 과히 불가능하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순영은 더욱이 아이의 정체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햇살이 코 끝을 간지럽히던 늦은 아침, 집안에 숟가락과 오래된 양철 밥그릇이 부딪혀 나는 소리가 쨍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할머니는 순영의 쌀밥 위에 조각낸 반찬을 올려 두었다. 밥 위에 놓여지는 반찬은 순영의 입 속으로 사라지기 무섭게 또다시 생겨났다. 오전의 나른한 적막 사이로 할머니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누굴 만나고 다니길래 만날 그렇게 싸돌아 댕겨. 이 주변에는 네가 놀 만한 데가 없을 틴디."
"어?"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밥을 한 숟갈 우겨넣었다.
"같이 놀러 댕기는 애라도 있는 것이여?"
순영은 머릿속으로 아이를 떠올렸다. 시리도록 흰 피부에 대조되는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그에 걸맞는 깊은 눈동자.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가늠조차 불가능한 항상 똑같은 표정. 오늘은 꼭 이름을 물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있잖아."
계곡물 속 자유로이 춤추는 물고기 한 마리에게 내내 엉켜있던 시선이 천천히 순영에게로 방향을 바꾸었다. 깊은 눈. 여전히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깊은 눈이었다.
"넌 이름이 뭐야?"
"…."
"난 권순영이야."
알아, 권순영. 감나무 밑 파란 지붕 집.
"어?"
아이에게 말해 준 적은 없었다. 처음 제대로 들어보는 아이의 목소리에 놀란 것도 잠시 그가 자신의 집을 알고 있다는 것에 의문을 품었다. 어떻게 알았어?
"그냐앙,"
그냥, 알아. 아이가 자신의 집 주소를 안다는 사실만 알아낸 채 그날도 순영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아이의 옷은 날개뼈를 드러낼 정도로 젖어있었다.
'내... 올... 게.'
'응...'
꿈을 꾸었다. 형체는 작았다. 총 두 개였다. 익숙한 바위. 순영의 머릿속을 약하게 울렸다. 어린아이인가? 작은 형체 둘은 그들만큼이나 조그마한 조약돌을 물 속으로 던지며 놀고 있었다. 분명 물에 젖은 옷은 보이는데, 얼굴만 보이질 않는다. 그 부분만 기억에서 도려낸 것처럼. 오래된 테이프를 꺼낸 듯 끊기는 목소리는 무슨 내용인지도 모를 정도였다. 곧 한 아이가 바위에서 일어나 저 멀리 사라진다. 멀리. 저 멀리로…. 그리고 남은 아이는 물에 휩싸여 사라지고 만다.
그날부터 비가 세차게 내렸다. 장마의 시작인지. 순영은 한동안 계곡에 나가지 못했다. 물이 불어나 위험하다는 할머니의 만류 때문이었다. 그 애는 나왔을까? 빗방울이 마당의 흙을 파내는 모습을 보며 찝찝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꿈. 형체. 조약돌. 계곡. 그리고 지워진 얼굴. 순영은 낡은 우산 하나를 챙겨 들고 곧장 계곡으로 향했다. 귓등을 때리던 할머니의 외침은 빗소리에 파묻혀 어디론가로 사라지고 말았다.
있다. 아이는 오늘도 있었다. 온몸에 비를 맞으며. 계곡물이 발끝에 닿을 정도로 불고 흙탕물이 되었지만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물에 젖은 조약돌을 던져대고 있었다. 성큼성큼 다가가 아이의 마른 어깨를 돌렸다. 손 안에 남아있는 빗물이 찝찝했다.
"너 미쳤어? 위험하게 이게 뭐하는 짓이야!"
"… 네가 약속했잖아."
"뭐?"
"내일도 온다고 했잖아. 네가 그랬잖아!"
순영의 눈동자가 혼란스러움으로 가득했다. 점점 거세지는 빗줄기가 검은 우산을 사정없이 때려온다. 머리가 띵해진다. 비가 우산이 아닌 머리를 때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이를 마주한 몸에 점점 열이 올랐다.
약속했잖아….
약속? 순영이 의문을 가졌다. 한껏 격양되어있던 목소리가 한층 누그러져있었다. 기운 넘치게 내리는 비를 온몸으로 받아낸 아이의 옷은 푹 젖어 더러워져있었다. 마치 모든 것을 쓸어버릴 듯 불어난 계곡의 흙탕물처럼. 아이의 젖은 옷은 물 속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내 이름,"
아이가 입을 열자 바위를 덮치는 성난 계곡의 소리를 포함한 주위의 모든 소리가 멈추었다. 그저 순영만을 눈에 담고 있는 아이와 그런 아이를 품으려 한 순영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찬이야."
아이의 등 뒤로부터 거센 바람이 훅 들이닥쳤다. 바람과 함께 타고 와 순영의 얼굴을 때리는 수많은 빗방울들. 순간 대처하지 못한 순영이 눈을 꼭 감고 우산을 겨우 앞으로 들이밀자 빗방울은 우산에 후두둑 튕겨나간다. 바람이 서서히 멎었다. 꼭 감고있던 눈을 뜨고 들고있던 우산을 올리자 순영은 주위를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앞에 서 있던 아이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이찬.
꿈과 아이, 그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아낸 듯 했다.
그날 밤 장맛비를 온몸으로 맞았던 순영은 고열에 시달렸다. 헛것이 보이기도 했다.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 자각도 하지 못하며 순영은 환영을 보았다. 찬이었다. 오늘도 익숙한 바위. 이전에 꿨던 꿈의 배경이었다. 그러나 더욱 선명한, 꿈. 아니 기억.
'내일도 올게.'
'응, 꼭 와! 기다리고 있을게.'
내일도 온다며 먼저 일어난 아이는 순영 자신이었다. 어릴 적의 그는 다른 아이와 함께였다. 그리고 그 아이는, 그래. 찬이 틀림없었다. 어릴 적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다르지 않은 얼굴이었다. 어린 순영은 인사를 건네며 저 멀리로 사라졌고 순영이 사라진 곳에는 머지않아 비가 후두둑 내리기 시작한다. 비를 온몸으로 맞던 어린 찬은 그대로 물 속으로 첨벙 뛰어들고 말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잊혀진 기억을 다시 꺼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자신을 걱정스레 내려다보는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이었다. 얹어진 물수건이 뜨끈했다. 할머니의 손이 다가와 이마 위의 수건을 거두고 손을 놀렸다. 다시 올라온 수건이 시원하다. 아직도 생생한 '기억'을 떠올리며 마른 입술을 열었고 사이에서는 잔뜩 쉰 소리가 흘렀다.
"할머니, 혹시 이찬이라고 알아?"
"찬이? 알다마다. 갸가 저 밑 과수원 아들인디. 저번 여름 이맘때쯤에 저어기 계곡에서 놀다가 장맛비에 물이 불어서 빠져 죽었던 애여."
끔찍한 일이지, 끔찍한 일이야…. 순영은 할머니의 읊조림을 귀에 흘려 들으며 정신을 서서히 놓다 이내 눈을 감았다. 아, 그 해 여름의 약속은 참 지독하게도 지켜졌구나.